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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로 다가오는 이유.........영화 크리피/비밀은없다

도마담 2016. 9. 19. 21:23


크리피:일가족 연쇄 실종사건/감독:구로사와 기요시/일본/2016.

                          


"남편하고 나하고 누가 더 매력적인 것 같아요?"

 

이웃 남자 '니시노'가 범죄심리학자인 '다카쿠라' 와이프인 '야스코'의 눈을 빤히 쳐다볼 때 보인 야스코의 표정이 의아하게 다가왔다. 낯선 이웃에 대한 경계와 끌림  사이 어딘가에서 저울질하는 그녀의 방황이 노출되는 것처럼 느껴졌다흔들리는 내면의 공허한 틈을 포착하면서 그녀의 손목을 꽉 잡는 장면은 여느 치정극의 상상을 벗어난다손목으로 주입된 니시노의 바이러스는 몸으로 침투하지만 내면으로 잠입한다. ‘니시노 ‘야스코의 혼을 쑥 빨아들이면서 자신에게 길들인다. 야스코에게 주목하게 되는 걸까.

 

야스코가 남편이나 이웃과의 표상적인 역할에 충실해보였기 때문에 그녀의 내면이 더욱 모호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인간에 대한 믿음과 범죄에 대한 판단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물인 주인공 다카쿠라의 흔들리는 심리는 영화를 끌고 가는 주요한 힘으로 작용하지만 그의 아내 야스코는 드러나 있지만 드러나지 않는 미묘한 인물이다. 이웃들을 위한 쵸콜릿 선물을 준비하고 남편의 식사를 늘 챙기는 불만 없는 그녀의 이미지에는 침입할 틈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니시노'가 등장하면서부터 그녀는 현관 입구 신발장위에 늘 놓여있는 단정한 도자기처럼 갑작스럽게 깨질 수도 있는 일상의 불안으로 작용한다.

 

영화의 공포는 후반부에 드러나는 니시노의 어두컴컴한 범죄공간에서가 아니라 니시노집안의 햇빛 들어오는 현관 입구에 넘실댄다. ‘니시노집 대문 앞을 오랫동안 바라보아야했던 불길함은 현관으로 진입하게 되지만 일상과 범죄의 문턱을 불안하게 넘나들며 실재를 목격하고자 하는 욕망을 지연시킨다.

 

현관입구에 들어서 복도를 지나 당도한 니시노의 내면은 충격적이라기보다는 예상 가능했기에 당혹스러웠다. ‘니시노의 폐쇄된 동굴에서 억압된 무의식이나 어두운 이면을 발견하기보다는 그의 다중적인 인격을 불쾌하게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타자의 세계를 스스로 두드릴 수 없는 니시노의 허약성은 일말의 책임을 감염자들에게 넘겨버린다. 시체를 처리하던 일을 마치며 그제야 일상작업이 끝난 듯 한가롭게 동물의 왕국을 시청할 때는 마치 악이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로 돌아서는 것처럼 느껴졌다. 악은 천연덕스러울 때 더 교활해지고 허약할 때 발흥한다. 악이 스스로 발을 빼고 감염자끼리 미끼를 물게 하면서 메카니즘을 스스로 작동시킬 때 영화가 삶의 공포로 다가왔다.

 

니시노에게 전염된 다카쿠라의 가족이 니시노의 가족으로 편입되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때의 호흡은 그래서 비관적이다. 혼이 증발되어 껍데기만 남은 혼령들이 탑승한 열차가 이승에서의 여행을 마치고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죽음의 계곡을 향해 느리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영화는 막바지를 향해 나아가지만 야스코의 비명에 찬 울음보다 더 소름끼치는 건 언제든 균열할 수 있는 위태로운 일상이었다. 이것이 충격적인 반전이나 피칠갑 없이도 공포로 몰아넣을 수 있는 감독 구로사와 기요시의 솜씨고 그의 작품세계에 좀더 깊이 들어가고 싶은 이유다.




                                         비밀은 없다/감독:이경미/한국/2015.


비밀은 없다라는 제목을 생각해보기로 했다. 참으로 어중간한 제목으로 보이지만 비밀은 없다라고 단정할 때 그렇다면 무언가가 있다라는 것이지 않은가. 정황상 영화 <비밀은 없다>는 영화 <곡성>과 정반대에서 출발한 영화로도 보인다. 무언인가 있는 것처럼 보였던 토속적인 지명의 곡성은 오컬트 세계의 미끼를 물게 되면서 펼쳐지는 요란한 분위기에서 시작했지만 사실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관객의 그 어느 부분도 건드리지 못했다. 영화 <비밀은 없다>는 평론가들이 불균질한 새로운 감각의 영화라며 소리를 높여도 무관심하기만 했었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난 후의 정리되지 않은 충격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한국사회의 많은 코드를 건드렸지만 환상적인 화면들이 속출했고, 모든 재료들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불협화음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았다. 저력이라고 하기엔 과잉이 넘쳐흘렀고, 산만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반전으로 향해 가닥을 잡고 나아가는 에너지가 단단해보였다. 숨 쉬게 하는 영화라기보다는 숨 가쁘게 긴장시키는 영화였다. 정치 선거 음모 지역성 여성 남성 가정 청소년 교육 왕따 동성애 계급 비주류음악 등등의 카테고리를 한꺼번에 끌어들인 이렇게 욕심 많은 한국영화를 본 적이 없다. 또한 매 씬마다 보여주는 디테일하고도 섬세한 충격은 과거 컬트영화를 볼 때의 반역 같은 것이었다. 영화<비밀은 없다>는 리얼한 요소를 곳곳에 배치한 후 환타지를 통과해 옷으로 적당히 가리려는 타협의 관성을 과감히 벗어던지며 당당하게 알몸을 드러낸다.

 

포르노적 환타지가 매력적인 것은 아니다. 숨김없이 화면을 꽉 채울 때 관객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반경이 허용되지 않는다. 충격적인 반전과 구성의 혁신성, 그리고 주제의 참신성에도 불구하고 주저하게 되는 이유가 있었다. 통쾌하지만은 않은 죄책감과 수치심도 따라온다. 깔끔하고 정직한 이미지로 등장하는 연홍의 남편 종찬의 가면이 벗겨지는 순간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연홍의 시점을 따라가다가 종찬과 맞붙는 순간 줄곧 관찰해오던 타자성이 자아 안으로 경계를 넘어 침범하기 시작한다. 화살을 쏘았는데 빙 돌다가 자신에게 날아 와 꽂히면서 자기 안의 타자성을 폭로하는 듯이 보였다. ‘연홍의 여성성이 종찬의 남성성에 기반 해서 생존해왔다는 시각으로 봤을 때 그들은 짝패였다. 그동안 쌓아온 총체적인 구도에 결정적인 메스를 가하며 무너뜨리는 자기반성은 매서운 삶의 통증이다.

 

생각을 하자, 생각을.....살려면 생각을 해야 된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극장전>에서 주인공 동수는 병원에 입원해 있는 영화 속 영화를 만든 감독인 선배를 만난다. 살고 싶다는 선배를 뒤로 하고 병원에서 나온 후 길을 걸으며 되뇐다. 허구와 실제의 경계 사이를 오가다가 관객에게 던지는 것만 같은 마지막 대사가 이따금씩 떠오르곤 한다. 영화<비밀은 없다>에서도 비슷한 대사가 나온다. “생각하자, 생각하자, 정신 똑바로 차리고 생각하자.” 주인공 연홍은 실종된 딸을 찾기 위해 자신을 다그친다. 이 대사는 연홍이 재탄생하기 위한 전환의 독백이자 기존 구도에서 벗어나기 위한 안간힘이다. 그런 의미에서 연홍이 발견하게 된 딸 민진과 친구 미옥의 비밀스런 아지트는, 그녀들이 새롭게 태어나는 되는 경이로운 자궁이면서 어쩌면 관객이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머무를 수 있었던 쉼터였다.

 

손예진이라는 배우가 누군가를 포옹할 때 큰 위안을 준다. 엄마 연홍이 딸 민진의 친구 미옥을 안아준다. “민진아, 많이 추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