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낯선 영화여행.

2018. 1. 4. 07:15카테고리 없음

                                         <잠입자 Stalker>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1979/러시아.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은 아니었다. 세 사람과 더불어 서서히 침잠하면서 함께 낯선 지대를 깊숙하게 탐사하는 여정으로 다가왔다. 수십 년 전에 사라진 마을 무인지대, 무의식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비밀의 방이 있는 그곳은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금지구역이었다. 초목과 물과 안개로 잠겨있는 비의의 공간은, 들어서는 순간 방향감각을 잃어버리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다다를 수 없는 초현실적인 영역으로 다가왔다. 가이드를 따라나선 작가와 과학자는 전인미답의 땅을 두드리는 예술과 과학의 개척자가 아니라, 마술적인 나침반에 이끌려 기울기를 달리하며 욕망이 드러나는 절망적인 인간들로 보였다. 시각적 탁월함에서 오는 디테일한 경이로움은 영화가 끝난 후에도 많은 질문들로 튀어나온다. 구역이란 삶에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정작 세 사람은 왜 비밀의 방에 들어서지 못했을까, 그들의 숨겨진 욕망은 무엇이었을까. 구역 바깥의 불구의 소녀는 초능력으로 컵을 움직인다. 타르코프스키 영화에 대한 본격적인 탐구를 이 영화로 시작할 지도 모르겠다.




                              <퍼스널 쇼퍼 Personal Shopper> 올리비에 아사야스/2016/프랑스.

유령 같은 영화가 아니라 유령 영화였다. 유령은 당연히 보이지 않았고 유령의 정체를 알아낼 수 없었다. 영화로 읽을 수 있었던 건 주인공 모린의 쌍둥이 동생 루이스가 죽었고, 모린에게 익명의 발신자로부터의 문자가 계속 오며, 모린이 남자친구 개리와 화상통화를 간간히 하고, 모린의 고용주 키라를 살해한 범인이 기자 잉고로 밝혀지는 것이다. 감독의 전작인 영화<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에서 막바지 즈음에 유령처럼 사라진 배우가 영매술사로 부활한다. 스타의 매니저에서 퍼스널 쇼퍼로 나타난 배우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단단하면서도 모호한 이미지가 현실과 영화를 넘나들고 영화 속 인물들을 매개하면서 실제와 허구의 경계를 허물어버린다. 영화<퍼스널 쇼퍼>는 첨단기기로 익명의 존재들과 일상적으로 연결된 이 시대에 질문을 던지는 영화로도 보였다현대유령의 출몰. 우리가 입고 싶어 하는 옷의 정체가 무엇인지, 우리는 누구를 위한 옷을 입고 싶어하는지. “혹시 너는 그저 나야?” 모든 씬을 흡수하는 듯한 눈부시면도 아득했던 화이트아웃. 유령의 정체는 우리자신?                              




                                <천국보다 낯선 Stranger than Paradise> 짐 자무쉬/1984/미국,서독.

신세계에서의 1년 후의 천국은 미국 뉴욕에서 클리블랜드로 플로리다까지 이어진다. 영화<천국보다 낯선>은 아이러니와 패러독스의 뉘앙스가 짙게 깔려있다. 소제목과 매 장면들 사이의 아이러니한 배치, 현실세계와는 이율배반적인 등장인물들의 기대가 핫도그가게의 노동과 경기장의 도박으로 대비되어 헝가리 이민자들의 아메리칸드림에 대한 패러독스한 실상과 허상이 허허롭게 드러난다. 이 영화에서 두 가지가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우선은 공간의 여백이다. 뉴욕 공항의 황량한 풍경과 클리블랜드 눈밭에 펼쳐진 하얀 호수와 파도만 밀려오던 플로리다 해변의 넓은 여백이 주는 아찔한 공허를 잊을 수가 없다. 또 하나는 인물들의 엇갈림이었다. 이 영화의 마지막은 여백보다 더한 여운을 남긴다. 목돈을 우연히 손에 쥐고 헝가리행 비행기로 탑승하려는 '윌리'의 사촌 에바’, ‘에바를 따라 헝가리행 비행기에 탑승한 윌리’, 모자를 찾으러 모텔로 다시 돌아온 에바’, 헝가리로 날아가는 비행기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윌리의 친구 에디’. 엇갈리는 동선과 허탈한 에디’의 표정으로 떠오르는 고독하고 담백한 리듬.

                                                 



                                             <뮤직룸 Jalsaghar> 티야지트 레이/1958/인도.

영화의 마지막에 영주 로이는 자신의 영지로 말을 타고 달리다가 떨어져 피를 토하며 죽는다. 웅장한 저택 테라스에서 로이가 아래층의 하인을 부르고 카메라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시작하는 것을 기억한다면, 영화 <뮤직룸>은 전통이 사라지는 과정을 위에서 아래로의 추락이라는 하강의 이미지를 그리며 자명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오프닝과 엔딩 사이 서서히 사멸해가는 퇴락의 정조에 있었다. 어두워지면서 밀려난다. 흔들리는 샹들리에의 촛불은 점차 꺼져가고 하인들은 하나 둘 그의 곁을 떠나고 아내와 아들은 폭풍에 배가 뒤집혀 사망하면서 저택의 암울한 비극은 극에 달한다. 신흥부자의 음악회에 맞선 로이는 마지막 향연에 모든 것을 건다. 고집스러우면서도 완곡한 영주의 자태, 전통에 대한 무모하면서도 음전한 자존심, 어둠이 다가오는 쇠퇴의 길목에서 태연하게도 오랫동안 절정으로 다다르는 음악과 춤.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계층, 그리고 예술이 존립할 수 있는 조건 -뮤직룸. 꽃은 지기 바로 전에 활짝 핀다.

                    



                  <붉은다리 아래 따뜻한물 Warm Water under a Red Bridge> 마무라 쇼헤이/2001/일본,프랑스.

제목이 주는 에로틱한 함의보다 훨씬 넓게 생동감의 파장이 지속적으로 퍼져나가는 의외의 영화였다. 이 영화가 낯설었던 것은 실험적 영화로써의 의외의 발견이 아니라, <돼지와 군함> <일본곤충기> <복수는 나의 것> <검은 비> 등 악과 어둠의 사슬을 심도 있게 추적한 이마무라 쇼헤이감독의 전작들과 견주어봤을 때 오히려 뿌리 깊은 낙관성을 건강하게 뒤집어내어 보다 활기 있는 영화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간 작품들을 관통해왔던 끈질긴 생명력이 넓은 바다를 만나는 영화<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은 '이마무라 쇼헤이' 영화세계의 변화전환’이 아니라 확장화합으로 다가왔다. 펌프질하는 남성성과 분출하는 여성성은 남성들만의 판타지로는 보이지 않았다. 분수녀가 뿜어낸 따끈한 물줄기는 강으로 흘러내려 물고기떼와 갈매기들이 몰려오고 낚시대가 드리워지고 바다로 흘러간다. 물의 이미지로 첩첩이 생성되는 만화적 상상력은 '생산'의 모성성보다 '포용'의 여성성으로 솟아나는 듯이 느껴졌다. 대중적으로 밝게 채색된 아랫도리 미학은 옥보단의 그네를 박차고 오른다


                      


                       <인랜드 엠파이어 Inland Empire> 데이빗 린치/2006/미국,폴란드,프랑스.

한 번 더 본다고 이 영화를 잘 말할 수 있을까. 아마도 영화감독이 데이빗 린치라는 이유로 다시 이해해보려고 노력하는지도 모른다. “정말 이상한 세상이야”  배우 로라 던의 기이한 얼굴 표정으로 강렬하게 빠져들며 영화로 흡입되어 혼을 흔들어놓는다. 그녀가 과거로 갔는지 현재에 있는지, 영화 속인지 영화 속 영화인지, 폴란드 단편영화<47>을 재현하는지 리메이크작 <슬픈 내일의 환희>를 촬영하는지, 애정을 나누는지 연기를 하는지, 집인지 세트장인지, 현실을 오가는지 꿈 속을 헤매는지 알 수가 없다. 그녀의 정체성은 어느 곳에도 어떤 시간에도 보이지 않는다. “내가 누구인지 제발 좀 알려줘”  푸르스름한 방에서 얘기를 나누는 토끼탈을 쓴 사람들, 텔레비전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여인까지 뒤범벅된 요지경의 세상은 댄서들의 춤으로 응집하는 순간 다면적인 상상력으로 무궁하게 발산한다. 우리가 꾸는 꿈이 시간과 공간을 뒤섞어 놓은 것이라면 영화<인랜드 엠파이어>는 여주인공이 꾸는 한 편의 악몽으로 보인다. 전작<멀홀랜드 드라이브>에서의 현실과 환상의 뫼비우스띠마저 산산히 조각나면서 퍼져나오는 불안과 두려움은 공포의 환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