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0. 9. 09:04ㆍ카테고리 없음
올해 로버트 알드리치의 영화<북극의 제왕>을 보고 나서 작년에 봤던 기이한 두 편의 영화가 떠올랐다. 최양일감독의 영화<피와 뼈>, 그리고 이마무라 쇼헤이의 영화 <복수는 나의 것>이다. 세 편의 영화가 걸작인지의 여부보다는 세 명의 캐릭터에 대한 강렬한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영화<북극의 제왕>의 '넘버원'은, 영화<피와 뼈>의 '김준평' <복수는 나의 것>의 '에노키즈'와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인간미가 느껴지기는 했지만, 세 인물들의 지칠 줄 모르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 에너지의 질량만큼은 영원불멸할 것만 같았다.
피와 뼈/감독:최양일/일본/2004.
'기타노 타케시'가 주역을 맡은 영화 <피와 뼈>에서의 '김준평'은 독보적인 개성으로 다가온다기보다는 집합적인 악마성으로 다가왔다. 식욕과 성욕에 충실한 그의 동물성은 그 동안 쌓아올려져왔던 가부장제라는 뼈대에 농축적으로 담겨있다. 그의 악마성은 폭발하고 치솟는다. 폭력이 뒹굴고 피가 솟아오르고 진저리가 날 정도로 약자들을 내동댕이친다. 감독은 '김준평'이라는 인물에 대한 어떤 논평거리도 제공하지 않고 그 악의 근원을 따질 틈도 주지 않는다. 자신의 '돈'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강자 약자 가리지않고 맞짱뜨는 김준평에게는 적수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죽음의 순간에도 거칠게 숨을 내쉬고 있는 '김준평' 곁에서 자신의 배고픔만을 채우고 있는 막내아들의 모습. 가장 소중한 것이 적수로 등장할 때가 있다.
복수는 나의 것/감독:이마무라 쇼헤이/일본/1979.
영화 <피와 뼈> <복수는 나의 것> 모두 차가우리만치 악의 표면성에 집중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복수는 나의 것>을 보고 나서는 어떤 결핍의 블랙홀로 빠진 느낌이었다. '에노키즈'(오카다 켄)의 어린 시절, 군인에게 굴욕적으로 배를 빼앗긴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아버지를 증오하게 되었고 살인마가 되었다고 하기에는 살인의 근거가 충분하지 않아 보인다. '에노키즈'는 가장 나약한 악마였는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세계 말하자면 강자로 표상되는 세상으로 진입할 수 없는 '에노키즈'는 대학교수로 위장한 채 주변인물들 중 약자들을 골라 죽인다. 사회학이나 심리학으로도 설명이 불충분한 '에노키즈'라는 캐릭터는 영화를 보고나서도 여러 궁금증을 유발하게 한다. 그의 커다른 구멍은 무엇으로 메울 수 있었을까. 끝없는 살의였을까. 수만 명의 경찰이 쫓는 연쇄살인범이 되는 것이었을까. 엔딩에서 허공에 멈춘 '에노키즈'의 뼛조각이 악의 불멸성이라고 얘기하기에는 어딘가 부족해 보인다. 여관집 모녀를 오가는 살의의 살얼음판으로 아버지와 아내 사이에 놓여있는 성애적 죄의식으로 저수지의 장어떼처럼 음습하고 뻔뻔하게 꿈틀거리는 '에노키즈'의 악은, 영화<복수는 나의 것>이라는 작품 자체에 대한 호기심으로 지속적인 긴장을 불러일으킨다.
북극의 제왕/감독:로버트 알드리치/미국/1973.
<북극의 제왕>에서의 '넘버원'(리 마빈)은 적수가 있다. 철도직원 '샤크'(어네스트 보그나인)와의 기차운행 중의 충돌은 볼만한 구경거리로 남아있다. 1930년대 대공황기 미국을 배경으로 노숙자들이 벌이는 무임숭차의 최고강자는 '넘버원'이다. 기차가 운행하면서 시작되는 그들의 치열한 생존게임 뒤에는 코믹한 숨바꼭질이 있다. 철도원'샤크'와 노숙자'넘버원'의 대결 이후 젊은 노숙자 '시가렛'에게 던지는 '넘버원'의 마지막 일갈에서 캐릭터의 강렬함은 예외적으로 고조된다. 넘버원을 넘어서보려는 '시가렛'을 넘버원이 던져버릴 때 넌 절대 날 따라올 수 없다는 듯, 더 숙련하고 오라는 듯, 무임승차의 절대고수 '북극의 제왕'은 전설처럼 기차 위로 사라진다. 달리는 열차의 몸을 총체적인 각도로 다루며 숨고 피하는 아웃사이더의 귀신같은 에너지가 온전한 장르영화 속에 통쾌하게도 사악하게 서려있다.
영화 속에서의 악은 필수불가결하게 보인다. 어떤 과잉의 에너지가 기존의 틀을 부수면서 그 안에 고인 피를 마시고 자신의 뼈대를 세울 때 파괴성과 흡혈성을 지닌 악으로 행세한다. 이럴 때 악은 자명한 실체다. 사실 선 없이는 악도 없고 악 없이는 선도 없다. 선악이 끊임없이 자리를 바꾸며 상황을 역동적으로 만들 때 선악은 서로에게 매혹적인 타자가 된다. 영화에서 그려진 악이 어떤 문턱을 넘어가는 타자성으로 작용할 때 악의 에너지는 그 영화가 품고 있는 가능성처럼 보인다. 하지만 악은 악이다. 악은 없애야 할 저 너머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 안에 도사리고 있는 적수일 수 있다. 악은 미리 간파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