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 부뉴엘<절멸의 천사> & 조셉로지<무슈 클라인>.

2018. 4. 11. 07:15카테고리 없음

<욕망의 모호한 대상> 감독:루이스 부뉴엘/스페인,프랑스/1977.

예전 비디오 대여점에는 장르의 국적은 불분명하지만 어딘가에 낑겨 있어야만 하는 영화들이 있었다. 때로는 람보2 아래에서 간혹 옆구리 터진 김밥부인 근처에서 이상한 걸작들을 찾아냈을 때의 묘한 쾌감이 있었는데 그렇게 발견한 영화가 <욕망의 모호한 대상>이었다. 이 영화를 계속 빌려보게 된 것은 그야말로 미치도록 모호했기 때문이었다. 주인공 여성의 모습이 헷갈려 정지화면을 거듭해보면서도 미스터리에 빠졌던 영화. 나중에야 여주인공의 배역을 2명의 여배우가 번갈아 맡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부르주아 남성과 빈민층 여성 사이에 벌어지는 욕망의 줄다리기에서 결코 잡히지 않는 잡힐 수 없는 욕망의 정체와 미루어지는 그 여분의 모호함으로 계속 미끄러지며 루이스 부뉴엘을 미지의 작가처럼 기억하고 있었다.


루이스 부뉴엘의 <절멸의 천사>는 저택에 머물고 저택을 통과하지만 관객을 또 다른 미궁으로 빠지게 하는 영화다. 오페라 관람을 끝내고 저택에 모여든 부르주아 예술애호가들은 저택을 빠져나오지 못한다. 문의 위치를 빤히 알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출구를 찾지 못하고 주저 누워버린다. ‘그들은 왜 저택에서 나오지 못하는 것일까.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저택에 머물게 하는 것일까라는 질문이 영화를 보는 내내 집요하게 따라다니고 예술의 공간이 폐허의 공간으로 변모하는 모습을 지켜보게 된다. 저택 안으로 곰과 새끼 양들이 뜬금없이 돌아다니고 핸드백에서는 닭발이 발견되면서 더욱 기이한 국면을 맞이한다. 이쯤에서 만찬이 시작되기 전 하인들이 소리 소문 없이 저택을 빠져나가고 집사 한 명만 남게 된다는 사실을 뒤늦게나마 떠올리며 이 영화는 발들이 사라진 이후의 영화는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발의 수고와 다리의 동력이 사라져버린 예술이 그 허상을 벗어버리며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는지, 부르주아 계급이 그 나르시시즘적 속성 안으로 어떻게 폐쇄적으로 빠져드는지. 저택 내부가 점차 허물어져가는 모습은 부르주아의 내면을 투사한 듯이 보인다. 영화는 생각해볼수록 간단치 않다. 성당에서도 빠져나오지 못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인간보편의 실존적 측면으로 접근하게 된다. 오직 양떼들만이 자유롭게 오갈 때 영화는 또 다른 질문을 낳는다. ‘우리는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찾지 않고 있는 것일까’ -

출구가 존재하기는 하는 것일까

<절멸의 천사 The Exterminating Angel> 감독:루이스 부뉴엘/멕시코/1962. 


                            




               

                                        <무슈 클라인 Mr. Klein> 감독:조셉 로지/프랑스, 이탈리아/1976.

배우 알랭 드롱의 치명적인 아름다움은 어두울 때 그 빛을 발한다. 개인적으로 봤을 때, 영화<태양은 가득히>에서의 그의 불안한 눈빛은, ‘루키노 비스콘티감독의 영화 <로코와 그의 형제들>이나 <레오파드>에서 양지로 나왔을 때보다, ‘장 피에르 멜빌감독의 영화들 <사무라이><형사>의 고독한 암흑 속으로 들어가 있을 때 제대로 되살아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조셉 로지감독의 <무슈 클라인>에서의 알랭 드롱의 모습은 거의 절망적으로 보였다. 배역에 대한 안타까움은 알랭 드롱의 저물어가는 매혹과 더불어 관객에게 매우 복합적인 심경으로 다가왔다. 나치점령기에 미술상인 '클라인'(알랭 드롱)은 자신과 이름이 같은 유대인 클라인의 존재를 알게 된다. '조셉 로지' 감독은 당시 기득권자였던 한 미술상인의 정체성을 중심으로 유대인들의 처지에 접근하면서 그 비극성을 드러낸다. 돈과 애인을 소유하고 있는 미스터 '클라인'은 애인에 의탁해 숨어 지내는 유대인 '클라인'을 찾아다니며 자신이 유대인이 아님을 증명하려고 한다. 하지만 미스터 '클라인'이 점차 유대인 '클라인'에 동화되어가면서 영화는 점층적인 무게로 가라앉는다. 미스터 '클라인'과 관객이 끝끝내 유대인 '클라인'을 볼 수 없었다는 점에서 영화의 비애는 극에 달한다. 이 영화를 미스터 '클라인'을 축으로 펼쳐지는 한 편의 심리극으로 보면 어떨까. 그때 영화는 역사와 더불어 개인을 끌어안게 된다. 미스터 '클라인'은 계속 거울로 자신을 확인한다. 거울의 이미지가 주는 동일시와 분열의 동시적 현상의 틈바구니에 머물고 있던 관객은 그가 미스터 '클라인'이자 미스터 '클라인'이 아님을 지속적으로 지각해나가며 희생양의 늪으로 무거운 걸음을 옮기게 된다.


오래 전에 보았던 '조셉 로지' 감독의 또 다른 영화<하인>이 떠오른다. <하인>은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영화<물 속의 칼>처럼 긴장의 각이 선명했던 영화로 하인과 주인의 위상이 뒤바뀌는 전복적이고 탈취적인 심리스릴러라는 느낌을 주었었다. 이 영화에서는 계단도 인상적이지만 무엇보다 거울이 자주 등장하여 실내의 인물들을 복제한다. <하인>에서의 거울은 주인과 하인이 놓은 위치를 뒤바꾸어 실내의 상황을 마주보게 하며 영화<무슈 클라인>과는 다른 영화적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주인이 하인을 부리는 현재의 관계가 하인이 주인을 길들이는 미래의 관계가 될 것이라는 반영과 역전의 기운을 자주 암시하는 듯이 보였다. 드러나 있으면서도 드러나 있지 않는 상황과 심리의 이중성을 묘파한 조셉 로지만의 영화들은 거울이라는 매개를 영리하게 활용한 덕분에 보다 심도 깊은 옹골찬 작품들로 보이게 하는 것은 아닐까.  

                                                       <하인> 감독:조셉 로지/영국/1963.